탁신의 몰락: 쿠데타의 배경과 피의 결말

2025. 7. 24. 16:30# 태국의 역사/- 톤부리 왕국

탁신의 몰락:쿠데타의 배경과 피의 결말

도입 – 신성한 왕에서 의심받는 인간으로

탁신 대왕은 아유타야 멸망 이후 톤부리 왕국을 재건하며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그의 통치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의심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해갔다. 초기엔 불교 보호자이자 유능한 군주였던 그는 말년에 종교적 과잉과 권력집중, 그리고 귀족층과의 갈등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켜갔다. 그의 몰락은 단순한 정변이 아니라, 왕권·종교·귀족이라는 태국 권력 3각 축의 균열을 드러낸 비극이었다.

1. 외로워진 왕: 말년의 통치와 신민과의 거리감

탁신은 말년으로 갈수록 정치·행정보다 종교적 수련과 명상에 몰입하게 되었고, 이를 두고 조정은 ‘광기의 시작’이라 평가했다. 그는 스스로를 보살(菩薩)의 경지에 올랐다고 주장했고, 이를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승려나 관료들을 처벌하며 반감을 키웠다. 한편으로는 극심한 군사비 부담과 징세 강화를 통해 백성의 원성도 고조되었다.

📜 탁신은 거대한 왕권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그 방식은 지나칠 만큼 급진적이었다. — 태국 왕실사 연구자 프라콘 짠나웡

2. 권력의 균열: 귀족과 장군들의 이반

탁신의 개인적인 권력 강화는 곧 귀족과 군 지휘관들의 견제를 받게 된다. 특히 당시 유력 장군이자 이후 라마 1세가 되는 ‘짜끄리’ 장군은 점차 탁신에게서 멀어져가며, 군 내부에서 새로운 정통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 귀족층: 지나친 세금, 관직 파격적 개편 등에 불만
  • 군부: 전쟁 지속과 중앙권력 집중에 대한 피로감

1779년~1781년 사이, 탁신은 대규모 숙청과 정적 제거를 단행했으며 이는 오히려 권력 기반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자충수가 되었다.

3. 쿠데타의 발발과 탁신의 몰락

1782년, 라오스 방면 원정에 나갔던 짜끄리 장군은 돌아오는 길에 왕궁에서의 혼란 소식을 듣고 군을 이끌고 톤부리로 진격한다. 당시 조정은 이미 탁신에 대한 반감이 팽배했고, 그의 측근 일부는 거의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탁신은 붙잡혀 왕궁 지하에 감금되었고, 며칠 후 극비리에 처형되었다. 탁신의 죽음에 대해선 ‘참수설’, ‘은거설’, ‘사찰 자살설’ 등이 있으나, 공식기록은 **“폭정을 막기 위한 정당한 처형”**이라 전한다.

4. 새로운 왕조, 차크리 왕조의 등장

쿠데타 직후 짜끄리 장군은 왕위에 오르며 라마 1세가 되었고, 수도를 톤부리에서 현재의 방콕으로 이전하며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다. 탁신의 흔적은 지워졌고, 공식 역사에서는 한동안 **“정신이 이상해진 폭군”**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지며, 탁신은 한계가 명확했지만 불굴의 개혁자이자 민족재건의 상징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 관련 위치 및 지도


🧭 인물 관계 간단 정리

  • 탁신 대왕: 전 톤부리 국왕. 말년 정신적 권위 강화 시도
  • 짜끄리 장군 (후일 라마 1세): 당시 유력 군벌, 쿠데타 주도자
  • 왕궁 귀족층: 탁신과 점차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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