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와의 외교 및 영향력 확대

2025. 7. 24. 12:32# 태국의 역사/- 톤부리 왕국

톤부리 왕국의 동남아 전략 ― 캄보디아와의 외교, 그 이상의 의미

톤부리왕국의 동남아전략(캄보디아와의 외교)

도입 – 왕국의 재건, 그 중심엔 외교가 있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미얀마(버마)의 침공으로 무너졌을 때, 당시 동남아시아 정세는 말 그대로 혼돈의 연속이었어요.
그 와중에도 생존을 선택한 인물이 있죠. 바로 **탁신 대왕(สมเด็จพระเจ้าตากสินมหาราช, 1734~1782)**입니다.

탁신은 아유타야 멸망 직후, 치열한 내부 경쟁을 뚫고 1768년 톤부리 왕국을 세웠고, 혼란 속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해외와의 외교 전략을 빠르게 복원하기 시작했어요.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외교 대상 중 하나가 바로 캄보디아 왕국이었습니다.

“국경을 넘는 정치란, 단순한 친선 이상의 의미가 있다.”
— 톤부리 왕국의 외교는 무력보단 외교로, 외교보단 전략으로 움직였습니다.

1. 아유타야 멸망 후, 캄보디아의 정세는?

1760년대 후반, 캄보디아(당시 크메르 왕국)는 시암(태국)과 베트남(당시 응우옌 왕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약소국이었어요.
왕위 계승 분쟁과 귀족 간 내분으로 왕실 권위는 극도로 약화,
그 틈을 타 베트남과 시암 모두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죠.

특히 1758년~1769년 사이엔 **두 명의 왕(왕자)**이 서로 왕권을 주장하며 전쟁과 망명, 외세 의존을 반복했어요.

📍 관련 지역: 현재의 프놈펜(Phnom Penh)과 우돈(Udong)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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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탁신 왕의 외교전, 무력 없는 개입

탁신 왕은 무력 개입 없이, 캄보디아 왕실 내 갈등을 활용했어요.

1769년, 그는 **망명 중인 캄보디아 왕자 인타파티와라옹(王子 อินทปฏิพัทธ์)**을 지원하면서도, 동시에 반대파인 노록(노롭) 왕자 쪽과도 접촉을 유지했어요.

📌 핵심 전략

  • 베트남과의 충돌 피함
  • 캄보디아 왕실에 '중재자' 역할로 비치게 함
  • 왕권 개입이 아닌 “안정과 귀환” 명목으로 군을 파견

결과적으로, 탁신은 직접적인 병합이나 침공 없이도 ‘시암의 영향력’을 캄보디아 귀족사회 전반에 확대시킬 수 있었어요.


3. 실제 파병과 외교 서한 – 명확한 존재감

1771년, 탁신은 직접적으로 군대를 보내 ‘우돈’ 인근까지 진출했고,
이 군대는 내전 상태의 캄보디아를 안정시키는 ‘평화 사절단’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사실상 힘의 과시였죠.

그해 남겨진 외교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우리는 당신의 백성을 돕기 위해 왔다.
그러나 피로 씻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 탁신 왕의 외교 서한 중

이후 1772년, 캄보디아는 시암에 대한 일정한 조공과 왕위 승인 요청을 동의하게 되고,
이는 ‘외교적 종속’ 상태를 의미하는 동시에 톤부리 왕국의 영향권 내 편입이었죠.


4. 베트남(응우옌)과의 삼각 외교

같은 시기, **베트남(응우옌 주)**도 캄보디아에 적극 개입하고 있었어요.
이때 탁신 왕은 양쪽 왕자 모두에게 지지를 표방하는 외교전술
응우옌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시암 중심 질서를 유지하려 했죠.

📊 비교: 1770년대 베트남 vs 시암의 개입 방식

항목시암(톤부리)베트남(응우옌)
접근 방식 외교+군사적 조율 군사 개입 후 조공요구
군사 파견 시점 1771년 (한시적) 1773년~1777년 (장기 주둔)
왕위 개입 정도 중립적 승인 왕권 지명 강제 시도
 

결국 캄보디아는 양국의 압박 속에서 시암 쪽에 더 가까운 균형 외교를 유지하게 돼요.
이는 탁신의 유연한 외교 전략이 실제로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5. 탁신 이후, 톤부리 외교의 유산

1782년 탁신이 실각하고 라마 1세가 차크리 왕조를 시작하면서,
톤부리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탁신이 남긴 외교 틀은 차크리 왕조 초기에 그대로 계승돼요.

특히 ‘소국과의 외교 조율’ 방식, 조공 체계의 복원 등은
차크리 왕조가 본격적인 동남아 질서를 재편하는 밑거름이 되죠.

📍 당시 외교 회랑 위치
→ 현재의 방콕 왕궁 서쪽 ‘타 씰라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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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 요약 – 무력보다 외교로 다가간 시암의 방식

탁신 대왕의 톤부리 왕국은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외교 질서에 강력한 ‘존재감’을 남겼어요.

무력보다는 중재자 역할, 강압보다는 협력이라는 방향성은
훗날 태국 외교의 ‘유연한 국방 외교’ 원형이 되었고,
특히 캄보디아와의 관계는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태국의 영향권 유지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습니다.


📊 참고 요약 표

항목내용
외교 상대 캄보디아 왕실
개입 방식 왕자 지원, 군 파견, 외교 서한
전략 방향 중립적 지지, 베트남 견제
결과 조공체계 부활, 영향력 확대
계승 차크리 왕조 초기 외교 틀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