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야 시대의 외국인 공동체와 거류지

2025. 7. 14. 15:00카테고리 없음

일본인 마을, 포르투갈 조계지, 베트남 거주지를 통해 본 국제도시 아유타야의 다문화 풍경


아유타야 시대의 외국인 공동체와 거류지

요약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아유타야는 수많은 외국 상인과 이주민이 모여 살던
다문화 국제도시였습니다. 일본, 포르투갈, 베트남 등
각국 이민자들은 별도의 **거류지(커뮤니티)**를 형성하며
경제, 군사, 외교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유타야의 주요 외국인 마을과 그 역할을 살펴봅니다.


1. 다문화 도시 아유타야의 형성 배경

아유타야는 전략적 지리 위치개방적인 대외정책을 바탕으로
다양한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 차오프라야강 유역, 말레이 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 중간 지점
  • 나라이 대왕 시대를 전후로 유럽 및 아시아 세력과 활발한 외교 무역
  • 국왕은 외국인 이민자들의 거류를 허용하되, 별도 거주구역을 지정

이러한 정책은 외국인 사회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살리는 동시에
왕권 통제력 유지라는 목적도 함께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2. 일본인 마을 (บ้างญี่ปุ่น, Japanese Village)

2-1. 무역과 무사(사무라이) 중심 공동체

  • 16~17세기: 일본이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며
    일부 무사·상인·기독교도들이 동남아로 이주
  • 아유타야에는 약 1,000명 이상의 일본인 이민자가 거주
  • 대표 인물: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
    → 나라이 대왕 이전 시기 아유타야 군대에 합류, 지방 총독으로 임명

2-2. 영향력과 몰락

  • 일본인 공동체는 용병 활동, 무기 공급, 무역 중개 등에서 중요
  • 그러나 일본 막부의 쇄국령(1635년) 이후 무역 단절
  • 17세기 중반, 야마다 파벌과 왕권 간의 갈등으로 마을 대부분 해체됨

3. 포르투갈 조계지 (Portuguese Quarter)

3-1. 동남아 최초의 유럽 이민자 공동체

  • 1516년, 포르투갈 사절단이 최초로 아유타야에 도착
  • 이후 항구 근처에 조계지(거류지) 형성,
    상인·선교사·군사 고문 등이 거주

3-2. 교역과 종교의 중심지

  • 총기 제조 및 훈련, 향료 무역, 기독교 전파의 거점 역할
  • 일부 포르투갈인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문화적 융합을 이룸
  • 성당과 묘지, 학교, 수도원이 함께 존재했던 구조
    → 오늘날 일부 유적이 방콕·아유타야에 남아 있음

4. 베트남인 거주지 (Annamite Community)

4-1. 망명·이주를 통한 유입

  • 17세기 중엽, **베트남 내 정권 분쟁(쩐 왕조 이후 내전)**으로 인해
    일부 귀족과 일반 백성이 망명 형식으로 아유타야에 정착
  • ‘안남(Annam)’이라 불리는 공동체가 아유타야 외곽에 형성됨

4-2. 노동력 및 무역 연결망 역할

  • 쌀농사 및 목축업, 중국-베트남-태국 간 무역 중개 역할
  • 일부 베트남계 인물은 왕실 하급 관리로 진출하기도 함

5. 그 외 외국 공동체들

  • 중국인 공동체: 아유타야 시기 내내 지속된 대표 이민 집단.
    무역, 재정, 조세 수납 담당. 조운제 핵심 인력
  • 페르시아인 공동체: 샤라푸딘, 쿤루 라틴 등 대표 인물 등장.
    외교와 왕실 의전 담당
  • 말레이-무슬림 공동체: 주로 무역 및 해운, 항구 노동 주도

이들은 각자의 구역에서 자치적 생활을 유지했지만,
왕의 통제를 받는 국가의 하위 단위로 존재했습니다.


6. 외국인 거류지의 도시사적 의의

  • 아유타야는 단순히 외국 상인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단위로 정주를 인정하고 역할을 부여한 유연한 체제를 갖췄습니다.
  • 이로 인해 군사, 외교, 문화, 종교의 전문 인력이 아유타야 내에 자생하였고
    이는 도시의 복합성과 생존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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